오늘 설교는 은혜보다는 교육적 내용이 마니 포함된 설교입니다. 참고 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 친척형이 몇년전에 51살 나이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병원에 들어간지 2주만에 죽었습니다. 이 형이 결혼할 당시에 엄마가 결사 반대했습니다. 결혼 당일날도 주걱으로 맞았는데 이유인즉은 어느 절의 고승이 말하길 이 여자와 결혼하면 아들이 죽는다는 거여요. 어쨋든 결혼을 했고 결혼 이후에 승승장구 했습니다. 근데 한창 잘나가는 나이에 죽었어요..어떻게 죽었느냐 하면 부인 언니가 한의사인데 몸에 좋다는 한약을 지어 주었는데 그 한약이 간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 거여요..부랴부랴 병원에 갔는데 의사말은 2주만 일찍와도 살수 있었다는 거여요..죽었을때에 어쨋든 그 스님의 말대로 부인과 연관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형은 죽었습니다. 스님이 미래를 예언한 것이죠..
바울이 마게도냐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종을 만났습니다. 귀신이 여종에게 미래에 대해 일어날 일을 이야기해주는 능력을 주었는데 주인은 이여종때문에 돈을 벌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맞으니까 사람들이 찾아온거고 주인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다른영과 귀신만 미래를 예언할수있습니까? 성령은 못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성령이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지혜의 말씀을, 지식의 말씀을, 믿음을, 병 고치는 은사를,
능력 행함을, 예언함을, 영들 분별함을, 각종 방언 말함을, 방언들 통역함등 한 성령이 전부 9가지 은사를 준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다니까 유다에서 온 선지자 아가보가 와서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과 발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허리띠 임자를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아가보가 바울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 얘기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 지도자 7 집사중 하나인 빌립에게 4명의 딸이 있었는데 4딸 모두 예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령외에 다른 영, 즉 귀신도 인간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고 또한 맞기도 합니다 그러면 두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여종안에 있는 귀신이 바울을 여러날 괴롭게 하니 바울이 예수이름으로 여종안에 있는 귀신에게 명령하니 그 영이 즉시 떠났습니다. 미래 예언에서는 같을수 있을지 모르나 힘으로는 성령이 월등히 뛰어나 다른 영들은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시간 성령의 능력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삶을 보면서 소히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어떠해야 되는가에 대해 얘기해보고자합니다.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과 감옥이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을 들은 바울은 예루살렘을 안가고 다른곳으로 갈 수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수께 받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고난의 길을 자원해서 갔습니다…예루살렘에서 로마로.그당시 모든길은 로마로통한다 라는 말처럼…로마에서 전세계로라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속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사용하기 원했고 이에 바울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간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늘 종말론에 빠져 인생도 포기하고 가족도 포기한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 사건 아마 아실것입니다. 1992년 10월 28일에 세계가 종말하면서 휴거(携擧), 즉 예수가 세상에 왔을 때 신도들이 하늘로 들림받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종말론을 주장하여 기독교 계에 파란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장림은 1987년에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는 예언서를 내면서 시한부 종말론을 적극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10월 28일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1992년 10월 28일 24시에 휴거 현상이 나타난다 해놓고 정작 본인은 1993년 5월 22일에 원금에 이자를 받는 금융상품을 사들인 것으로 확인되었지요. 속는 사람들만 불쌍한 거여요
사람들이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얘기를 종종하는데 그것을 확인 하는 방법은 오직 그 결과로 밖에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내가 보낸 선지자와 보내지 않은 선지자 구별 방법은 말한것이 이루어지면 내가 보낸 선지자이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보내지 않은 거짓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와가 유다백성에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을 섬겨서 살아 남으라
애기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 전염병, 배고픔으로 죽을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식 손자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도 느부갓네살 왕을 섬길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점쟁이들이 바벨론왕 섬기지 말라는데 그것은 거짓말이니 듣지 말라고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냐라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 이름으로 예언하기를 2년 내에 바벨론에 잡혀간 유다 포로들이 다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년안에 느부갓네살왕이 모든민족에게 지운 멍에를 벗겨준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2년내에 포로들이 돌아오지 않았고 유다백성들은 70년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사칭한 거짓선지자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죽음이었습니다. 2달후에 하나냐는 죽었습니다
만민중앙교회 이재록 목사 설교를 보니 권능 1단계,2단계,3단계, 4단계를 언급하더라고요..요즈음 뭐 좀 새로운 소리하면 사람들이 많이 몰립니다. 들어보지도 못한 하늘나라니 영계니 하면 더 몰립니다. 하지만 은사받은 사람들을 진짜 신뢰할만한 기준은 그 사람의 영적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이라는 겁니다. 일이 꼬이고 답답하면 다급한 마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리 저리 알아볼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그러면 어떤 사람을 찾아가야 됩니까? 좋은 열매를 맺는 은사자를 찾아가야지요…
마태복음 7장에 예수님께서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란 무엇일까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첫째는 겸손입니다. 겸손한 은사자 찾기가 해운대 백사장에서 바늘찾기입니다. 은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지 은사자가, 사람이 높아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빠졌던 함정이 이것입니다.
민 2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 광야에서 물을 달라고 거칠게 요구할 때, 모세는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마치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반석에서 물을 내는 자인 것처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민 20:11) 하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반석에서 물은 많이 솟아나왔지만 그 일로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내 영광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민 20:12) 사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는 것은 엄청난 이적입니다. 그러나 그 이적을 행했던 모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어떤자입니까?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라 했고 산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등을 본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정한 선을 넘으면 가차없는 것을 봅니다. 이처럼 능력이 나타날 때, 은사자 자신이 드러나고 높아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은사자들이 능력이 나타날 때 하나님 영광을 가로채려고 했기 때문에 다 넘어졌습니다.
둘째는 상식선에서 은사자는 덕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어떤 우월감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한다든지, 비방하고, 싸우려 든다. 가정이 망가지고, 교인들이 갈라지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이게 다 십중팔구 이단으로 빠지는 징조입니다
예수이름으로 은사받았으면, 거저 받았으면 거저 주어야지, 바울이 천막 만들면서 먹고살았지…병고쳐주었다고 귀신좇아 주었다고 먹고 산 것은 아니쟎아요…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한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서 돈 요구하고 잘난척 하고 ..이건 예수이름으로 등쳐먹는 사기꾼입니다..
차라리 점쟁이는 예수이름 팔지는 않쟎아요. 점쟁이들이 큰 굿판을 벌리고 작두에 올라가려고 할때 사람들한테 물어보쟎아요? 혹시 여기에 예수신 믿는사람 있으면 나가달라고? 왜요? 괜히 센신이 얼쩡거려 자신이 하는 영업, 즉 작두에 설려고 하는거 방해 말아달라는 거쟎아요.
예수가 자기들이 섬기는 신보다 한수위인 것은 인정하쟎아요..
그러므로 좋은 열매가 없는 기독교의 은사자들은 점쟁이보다 못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장로교 통합측과 여의도 순복음교회 사이에 이단 싸움이 있었습니다. 1982-1994년 무려 12년동안 장로교 통합측은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이단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중 하나가 한경직목사가 담임하는 영락교회 K장로가 암이 걸렸는데 안수하면 낫는다고 선금을 기천만원 줬지만 사망했습니다. 문제는 K 장로가 사망한 이후에 순복음 측에서 사람을 보내약속한 잔금을 달라고 했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이건 있을수 없는 일이라 하면서 시작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은사를 가진자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아합왕앞에서 미가야 선지자와 400여 가량의 선지자가 서로 다른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은 아합왕에게 당장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라고 하나님이 승리를 약속하셨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를 하는 반면에 유독 미가야 선지자만 다른얘기를 했습니다. 아합 너 거기 나가면 죽는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오직 미가야만이 하늘나라 회의를 환상중에 보았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정확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주주의의 원칙도,다수결의 원칙도 여기서는 통하지 않습니다….거짓을 말하는 영을 직감하는 즉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가진 미가야…그 영분별 은사의 결과는 돈과 명예과 아니라 감옥행이었습니다. 미가야를 성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 앞에 끌고가서 옥에 가두고 죽지않을 만큼의 떡과 물을 주라고 아합왕은 명령했습니다
바울이 몸에지니고 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그에게서 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하여도 악한 귀신이 쫖겨나고 병이 물러 갔습니다. 어떤면에서 에수를 믿으면서 예수님보다 더 큰 기적을 보여준 은사자 바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택한길은 대접받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가이사랴지방에서 나눈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내용입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 지혜로다. 네 신앙의 고백 위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까지 했습니다.
잠시후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 얘기를 해야 되겠다하고 얘기를 꺼내자 마자 베드로가 말립니다 결코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베드로는 친구같은 예수님이 죽어러 간다니까 말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말렸는데
웬 날벼락 “사탄아 물러 가라”“너가 하나님 일을 생각안하고 인간의 일을 생각한다”고 예수님 말했습니다. 마귀가 베드로의 생각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영을 분별하셔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영분별의 은사를 보이신 주님또한 묵묵히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이처럼 은사자가 걸어간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 강력한 은사를 행하였던 사도들은 결국 순교의 길을 같습니다. 이적을 행하는 은사가 교회 성장이나 대형 집회의 사람모으는 수단이거나 은사자의 부와 명성을 얻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면 벌써 거짓과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전 처음 몬트리올 갔을때 여기서 기도 많이하고 은사받아서 주의일해야 되겠다 생각하면서..처음에는 하나님께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습이다..이은사 저은사…그러다가 32개월이 지나 나와서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은사는 기도로 내가 원해서 받는게 아니다…은사는 내가 목회 성공하긴 위한 수단, 능력있는 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사를 받아 뭘 어찌해 보겠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고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사는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갖고 하나님의 때에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 속에 은사를 받은 은사자는 하나님이 주신 고난의 길을 즐거이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결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 간 바울, 감옥에 간 미가야 선지자,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다 은사자들입니다
치유의 은사자, 예언의 은사자, 영분별의 은사자
교우 여러분
저희는 혼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영분별의 은사가 필요하고 때로는 예언의 은사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은사들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는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역사를 위해 즐거이 고난의 길을 걸아가는 데 동력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따르지 않는 은사는 우리의 답답한 심령을 풀어줄수는 있으나 하나님의 사역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몬트리올 32개월동안 배운 것은 은사와 고난, 고통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 은사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실상 은사와 고난은 사람과 공기처럼, 바늘과 실처럼, 끊을래야 끊을수 없는 관계인 것을 잘 모릅니다. 어쩌면 고난 없는 은사는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 즉 속빈 강정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아니 은사를 받기 원하십니까? 사모하십니까?
은사에 대한 이런 이해 속에 은사를 사모하면 하나님이 더 즐거이 빗장을 풀지 않겠습니까?